이 상 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형법에 잔존해 있던 낙태죄 처벌조항을 폐지해 달라는 청원이 2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올라가고 이 청원에 대하여 청와대가 입장표명을 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낙태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형법은 제269조에서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하위법률인 모자보건법은 광범위하게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본인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 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보건 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낙태를 행할 수 있도록 광범위하게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제14조).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는 첫째로, 낙태 허용기간을 임신한 날로부터 28주일 이내에 있는 자에 한하여 낙태를 시행할 수 있다고 특정하고 있으며(제1항),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으로서 유전성 정신분열증, 유전성 조울증, 유전성 간질증, 유전성 정신박약, 유전성 운동신경원 질환, 혈우병, 현저한 범죄경향이 있는 유전성 정신장애, 기타 유전성 질환으로서 그 질환이 태아에 미치는 위험성이 현저한 질환을 특정하고 있으며(제2항), 전염성 질환으로서는 풍진, 수두, 간염, 후천성면역결핍증 등을 특정하고 있다(제3항). 결국 낙태죄 폐지청원은 하위법률에 맞추어서 상위 법률을 개정하고자 하는 시도다.
기독교인은 낙태죄 폐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낙태죄 폐지 논쟁에서 기독교인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낙태가 기독교윤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정당한가 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만일 낙태가 성경적 관점에 어긋나는 죄라면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낙태가 죄가 아니라면 낙태죄 폐지에 동의해도 무방할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낙태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바로미터는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낙태를 살인죄로 판단하는 바, 그 이유는 기독교생명윤리는 수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 생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생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인간의 시작점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a.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시작되는 조건은 자양분이 공급되는 경우에 자기복제와 단백질생성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수정란이 형성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수정란이 형성되기 이전에 정자가 정자 혼자 있을 때, 그리고 난자가 난자 혼자 있을 때는 이 두 가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정란은 자양분만 공급되면 자기복제와 단백질생성을 시작한다.
b. 유전학적인 관점에서 한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결정하는 유전자 구성이 완성되는 시점이 바로 수정란이 형성되는 시점이다.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형성된 유전자 구성은 향후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연속적으로 지속된다.
c. 인간으로서 출발한다는 말은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없이 신체만 가지고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영혼이 수정란 형성 시점에 신체 안에 들어온다는 생각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성경은 잉태의 시점부터 출산할 때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서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이 기간 중의 어떤 특정한 시점도 명시하지 않고 연속선상에서 인격체로 다룬다.
성경은 특별히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인칭대명사인 “나” 또는 “너”로 호칭함으로써 자궁 속의 태아가 영혼을 가진 인격체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욥은 태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나”라고 호칭하고 있으며(욥 31:15), 이사야도 자궁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 “너”라고 호칭한다(사 44:24).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궁 속에 있는 예레미야 자신을 하나님이 구별하셔서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는데(렘 1:5), 태 안의 예레미야가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구별한다든지, 선지자로 세운다는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오는 시점
호세아서 12장 3절에 보면 태중에 있는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자궁 속에 있는 야곱이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면 야곱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표현은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누가복음 1장 15절을 읽으면 자궁 속의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자궁 속의 세례요한이 영혼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가 있을까? 또한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가 문안차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세례요한이 “복중에서 뛰놀았다”고 되어 있는데(눅 1:41),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가 아니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
그 밖에도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아이”라고 호칭한다든지(눅 1:41,44), 예수님을 가리켜서 “구주”라고 호칭한다는 것(눅 1:46,47)은 태중의 세례요한이나 아기 예수가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임을 지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은 다윗이 자궁 속의 자기 자신을 묘사한 본문들인 시편 51편 5절과 시편 139편 13절 말씀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이 두 본문에서 다윗은 “잉태 → 장부지음/조직 → 출생”까지의 전 과정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나”로 호칭함으로써 태아 자신이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임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잉태”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 안에 영혼이 신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작점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 히브리원어로 “잉태”는 “성교를 갖다”는 뜻이다. 생물학적으로 신체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수정란의 형성시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자궁 속에 “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인 “성교를 갖다”는 표현과 수정란 형성 시점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수정란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때 형성되며, 정자와 난자가 만나기 위한 선결조건은 남성이 사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남자가 사정을 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성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교 시에 사정된 정자가 난자를 만나는 시점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나, 아무리 빨리 만난다 하더라도 성교를 갖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교를 갖는 시점”인 잉태의 시점은 가장 빨리 수정란이 형성되는 시점까지를 확실하게 포괄한다. 곧 시편은 수정란이 형성되는 모든 시점을 그 안에 다 포괄한다. 따라서 이 두 본문에 근거하여 수정란이 형성되는 시점에 영혼이 들어와서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인 “나”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결론은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하여 수정란이 형성되는 다양한 시점들 가운데 어느 한 시점도 놓치지 않도록 배려하시면서 “잉태”의 시점부터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 의거하여 안전하게 수정란이 형성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인간은 영혼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인격적 주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d. 어떤 사람들은 수정란은 인간으로 봐주기에는 너무 작지 않느냐 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다. 원래 크다든지, 작다는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수정란에 비교해 볼 때 성인의 몸은 어마어마하게 큰 실체다. 그러나 성인의 몸은 지구에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미세한 존재일 뿐이다. 비행기를 타고 1킬로미터만 올라가도 인간은 아예 보이지 조차 않는다.
수정란이 성인에 비교해 볼 때 지극히 미세한 존재이지만, 수정란 안에 있는 핵, 그 핵 안에 인이 들어 있고 인과 핵막 사이의 작은 공간에 실타래처럼 꼬인 모습으로 들어 있는 염색체 안에는 500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 5000권에 해당하는 30억 개 가량의 엄청난 분량의 유전인자(nucleotide)들이 들어 있으며, 이 유전인자들 안에 성인의 신체구성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다 들어 있다.
이 유전자들의 세계는 이미 하나의 소우주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크다거나 작다는 개념은 그다지 중요한 개념들이 아니다.
e.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실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데도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렇다. 유실여부가 인간이다 아니다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자궁에 착상된 후에도 유산되는 태아들이 많다. 유실여부에 근거하여 인간여부를 따진다면 한해 200만 건이나 되는 낙태에 의하여 유실되는 태아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가?
출산 후에 죽은 신생아도 있고, 성인이 된 후에 전쟁, 교통사고, 질병 등으로 죽어서 유실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만일 유실 여부가 인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인간이 아닌 존재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인간의 일생이 시작된다.
수정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인간임을 전제하는 이상 모든 형태의 낙태는 살인행위이며, 낙태가 합법화되는 경우는 생명의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경우뿐이다.
예컨대 자궁 외 임신의 경우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임신3개월이 되면 난관이 터져 태아는 어차피 죽게 되고 임산부는 복부출혈 때문에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는 임산부를 살리기 위하여 낙태시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치명적인 자궁암이 발병되었을 경우에 자궁암을 그대로 두고 출산을 시도하면 태아는 살릴 수 있으나 임산부는 죽을 가능성이 있고, 자궁암 수술을 하는 경우에는 임산부는 살릴 수 있으나 태아는 죽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태아의 생명과 임산부의 생명 중에서 불가피하게 어느 한 생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권과 임산부의 행복추구권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낙태가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은 낙태허용사유가 될 수 없다. 이런 사유들로 인하여 임신이 되는 경우에 태아에게는 아무런 도덕적인 잘못이 없으며, 태아도 보호받아야 할 희생자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태아를 낙태시키는 것은 아무 잘못도 없는 아기에게 벌을 뒤집어씌움으로써 또 하나의 악을 첨가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임산부가 아이를 키우기를 부담스러워 한다면 입양을 보내는 방법 등을 통해서라도 아기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임산부가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정하는 것은 곤경에 처한 아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거룩한 사랑의 실천이다.
산전 진단 등을 통하여 태아가 기형아임이 확인되는 경우에는 오진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기형아임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기형아를 인간으로 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낙태는 허용될 수 없다. 기형아를 포함한 모든 아기들은 살아 있기를 원한다. 기형아가 불행할 것이며, 죽고 싶어 할 것이라는 판단은 기형아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낙태를 원하는 자,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이때 낙태를 원하는 자는 만일 자신이 기형을 가진 태아라면 무엇을 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가 임신했을 경우에도 낙태는 허용될 수 없다. 덜 자란 아이일수록 자궁경부를 팽창시키기가 더 어려우며, 자궁이 손상 받을 경우에 자궁이 무기력해져서 불임의 원인이 된다. 자라고 있는 아이의 경우에는 뼈대가 부드러워 골반이 성장한 여성 보다 산고를 더 잘 견딜 수 있다.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원치 않는 임신을 사전에 예방하고 낙태를 줄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피임법이 있다.
로마 카톨릭교에서는 피임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연법적인 질서를 거스른다고 보고 자연적 주기법을 이용하는 피임법 이외의 모든 피임법을 부당한 것으로 판단한다.
물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세기 1장 28절 말씀에 근거하여 피임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아 키우는 것도 훌륭한 신앙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정복하고 경작해야 할 땅은 무한히 널려 있고 사람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 뿐인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고, 오늘날은 이미 인구가 온 지구상에 충만하고 넘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적절한 선에서 자녀를 가진 후에 책임 있는 태도로 피임이라는 방편을 사용한다고 해서 비신앙적인 태도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성교 직후에 복용하는 사후피임약은 수정란에 손상을 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낙태약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피임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낙태건수 중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주부낙태의 경우는 남성이 받는 간단한 정관수술로 쉽게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