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용 희 교수
에스더기도운동 대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하셨고, 그러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리라.” 하셨다. 우리가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정확하게 알고 그 부르심의 길을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무작정 가다가 산 정상에 올라서야 “여기가 아닌가봐” 하면서 다시 내려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에스더가 왕후의 위를 얻은 뜻은
성경 에스더서는 두 가지 단어로 압축이 될 수 있다. 하나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나는 “하만의 궤계”이다. 우리는 하만의 궤계를 올바르게 파악해야 하고, 그런 후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왕의 치리가 나타나게 된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은 10대 후반쯤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 당시 근동지역에서 10대 후반이면 시집을 간다. 에스더는 아무런 백그라운드가 없었다. 전임자인 왕후는 왕 앞에서 거들먹거리다 폐위가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왕후인 에스더는 아무런 배경이 없는 시골 처녀나 마찬가지였다. 뒤를 봐주는 사람도 없고, 명문가의 집안도 아니고, 출중한 능력이 드러난 사람도 아니다. 결혼을 했는데 왕이 한 달 동안 와보지를 않는 것이다. 첩들에게 가는 거였을까? 에스더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소박맞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가서 “우리 민족이 다 죽게 되었으니 네가 왕에게 나아가서 우리민족을 살려달라고 청원을 하라”는 것 이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던 에스더는 “삼촌, 왕이 부르지 않는데 왕에게 나가면 죽입니다. 왕은 나에게 한 달 동안이나 오지 않았어요”라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한술 더 뜬다.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일깨운다. 그리고는 “네가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민족은 다른 길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에스더를 에스더 되게 한 모르드개
모르드개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어린 왕후에게, 왕이 한 달 동안 찾아오지도 않는 상황인데도, 왕을 찾아가 ‘하만의 궤계’를 알리라고 하는 것이다. 에스더가 못하겠다고 하니까 “네가 이때를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일깨운다. “네가 잠잠하고 말하지 않으면 이 민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너와 네 가족은 멸망할 것이다!” 에스더를 에스더 되게 만든 것은 이 모르드개의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에스더로 하여금 금식하며 돌파하게 하였고, 그래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한 것이 바로 모르드개의 믿음이었다. 모르드개에게는 유 대민족이 사탄의 궤계로부터 반드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멸하지 않고 구원하시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첫 번째’ 의의 병기는 “너 에스더다!”라고 말한 것이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은 ‘두 번째’ 병기를 쓰실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두 번째’ 병기로 쓰임 받았던 대표적인 분이 바로 골리앗을 쳐죽인 다윗이다. 사울과 그의 병사들은 이스라엘 정규 군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뛰어나가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너무 답답하셔서 민간인을 쓰신 것이다. 그것도 나이가 어려서 군대도 못 갔던 미성년자를 쓰셨다. 에스더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은 두 번째나 세 번째 병기를 쓰실 수 있다. 사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도 기적이었다. 그런데 “너를 이때를 위해서 만들었다. 너무나 중차대한 직분을 맡겼는데 네가 이 때에 만일 움츠러들어서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 받고 직분을 받은 것은 두려운 일이다. 에스더에게 “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네가 부름을 받았는데, 네가 마땅히 해야 할 그 일을 안하면 너와 네 집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이것이 영적인 원리이다.
부르심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도 자기 본분을 행하지 않은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군대가 모두 다 전쟁 나가 있는 때에 그는 근신하지 않고 궁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먼 데서 목욕하는 여인을 본 것이다. 우리야 같은 사람은 휴가를 줘도 전쟁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와 동침하지 않았다. 왕이 근신하며 기도하고 언행을 삼가야 할 그 때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으니 큰 죄를 짓고 실 족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음란하고 부패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번영을 주셨는데, 그러면 일차적으로 우리 북한동포들부터 살려야 하는데, 북한 동포들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도 우리 남한교회가 눈과 귀를 꼭꼭 막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남한까지 적화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두시는 것이다. 이제라도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나 자리는 그에 상응하는 마땅한 헌신과 책임 감당이 있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저주나 심판이 될 수 있다.
에스더의 전략: 금식과 연합
에스더도 참 훌륭한 점이 많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권유를 듣고 “그래요? 그럼 내가 갈게요!” 하고 무작정 뛰어나가지 않았다. 모르드개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수산궁에 있는 유대인들을 다 모아서 나를 위해 3일을 금식하십시오. 나도 시녀들과 더불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3일을 금식하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어린 소녀 에스더는 굉장히 귀중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연합금식기도”이다. 에스더가 금식을 하는데 혼자 하지 않는다. 자기 시녀들과 더불어 같이 금식한다. 에스더는 적어도 자기 시녀들에 대해서는 제자훈련을 끝낸 것처럼 보인다. 바벨론의 이방신을 숭배하는 시녀들을 붙잡고 같이 금식기도하자고 했겠는가? 그녀는 궁중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이미 신앙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던 것 같다. 영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에스더는 어리지만 정확한 통찰력으로 자신의 부르심이 이때를 위한 것이라고 깨달았을 때 그냥 나서지 않고 많은 중보기도를 부탁한다. “연합 금식기도”를 부탁한다. 그리고 자신도 자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금식한다. 그 후에 왕에게 나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왕 앞에 가자마자 무릎을 꿇고 울면서 “나 좀 살려 주세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고 왕을 잔치에 초청한다. 왕은 오랫동안 에스더를 안 봤기 때문에 에스더가 왔을 때 “아, 무슨 급한 일이 있나보다” “무척 중요한 일이 있나보다”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민족의 사활이 걸렸을 뿐 아니라 대적인 하만이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에스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전을 잘 짜야 했다. 첫날 일을 해치우지 않고 일단 왕의 마음을 더 얻는다. “잔치에 오시옵소서.” 또한 하만을 함께 잔치에 초청한다. 왕은 몹시 궁금해지게 된다. “무슨 일로 왕후가 목숨을 걸고 나한테까지 왔을까!” 왕은 에스더의 잔치에 가서 진미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왕후를 돌아보게 되고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왕이 에스더에게 소원을 물었지만 에스더는 서두르지 않고 왕을 하루 더 잔치에 초청한다.
그 다음날도 왕은 에스더의 요청에 따라 잔치를 즐기면서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소원을 물었다. 그 때 비로소 에스더가 대답했다. “내가 노예만 되도 왕을 괴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과 내가 다 죽게 되었으니 구해주십시오.” 왕이 깜짝 놀라면서 그런 끔찍한 일을 도모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에스더는 정면에서 “대적과 원수는 바로 이 하만입니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하만은 두려워 떨었고, 왕도 너무 당황했지만, 왕후가 하만의 면전에서 한 말이라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왕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에 하만이 살려달라고 에스더 앞에 엎드려서 빌었다. 왕이 들어오는데 그런 하만의 모습이 꼭 강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내 앞에서 이젠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느냐?” 말이 떨어지자마자 경호원들이 와서 하만을 붙잡았다. 마침 곁에 있던 사람이 고한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들어 놓은 장대가 있습니다.” 왕은 그 장대에 하만을 달아 죽이라고 명한다.
금식기도의 능력
기도를 많이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꼭 강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기도가 농축되면 폭발할 때 그런 역사가 나타난다. 보통 처녀들 같으면 이렇게 못한다. 억울한 일이 있거나 하면 지도자에게 혼자 가서 하소연한다. 그런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하만 앞에서 어린 왕후 에스더가 “바로 이 하만”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전략이었다고 본다. 아마 에스더가 왕에게 혼자 찾아가서 얘기했다면 왕은 평소에 신임하던 하만을 따로 불러 물었을 것이다. 하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 다음에는 참모들을 불렀을 것이다. 참모들이 이방 민족 출신인 풋내기 왕후의 편을 들까 아니면 현재 막강한 권세를 쥐고 있는 하만의 편을 들까? 참모들이 하만 편을 들어 싸고 돌면 에스더는 또 폐위되거나 처형되고 유대인들은 멸절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전략은 완벽했다. 에스더가 금식할 때 받은 능력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다. 금식하니까 전략도 나오고, 그 전략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능력도 온 것이다. 순종하며 나갈 때 하나님의 수순대로 처리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려고 했던 날이 원수들을 죽이는 부림절로 바뀐 것이다. 한 번으로도 부족해서 두 번에 걸쳐서 원수 갚는 날이 진행된 것이다.
에스더에게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민족을 살릴 때 연합해서 금식을 한 것이다.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요청했고, 자기 자신도 시녀들과 더불어 금식하였다.
민족을 살리는 금식기도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와 금식』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어떤 것들은 금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기독교는 극기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 안에는 쉼과 누림이 있고 우리가 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셨다. 그런데 영적인 싸움을 할 때, 어떤 때는 금식을 해야 돌파가 되고 성취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금식하셨다. 예수님은 안해도 되는데 그냥 금식을 하신 것이 아니고, 금식을 해야 하니까 금식하셨다. 예수님은 극기 훈련자가 아니다. 철야기도를 괜히 하신 것이 아니다. 철야해야 하니까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영역은 금식을 해야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되살리는 길은 성경에서는 대부분 금식으로 나타난다.
금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의 집안에 하나님의 칼날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그가 간통해서 낳은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나단이 간 후에 그 아이가 아팠고, 다윗은 7일을 금식했다. 다윗은 “내 죄악 때문이니 하나님 차라리 내 생명을 데려가십시오.” 했다. 그러나 아이는 결국 죽었다. 하나님이 혹 살려주실까봐 금식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금식을 해도 되지 않는다. 금식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하나님한테 떼쓴다고, 금식한다고 무조건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을 살리는 기도는, 민족의 획기적인 변혁은 대부분 금식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니느웨성의 금식이다. 에스더의 금식이고 미스바에서의 금식이다. 성경에 보면 ‘민족’이 금식을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못 피한 경우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중보기도자들이 기도와 금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심 받은 기도자들의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하고 더 치열해야 한다. 에스더기도운동의 단기적인 부르심은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생명을 드려 기도로 섬기는 것이다. 여기서 잘 감당해내면 하나님께서 장기적인 사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근성 있는 기도자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처럼 우리는 근성이 있는 기도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의 일을 할 때는 부르심과 뜻을 분명히 알고 해야 한다. 한 선교사님은 고3때 전공과 대학을 정하기 전에 자기 진로를 놓고 일주일 금식을 했다고 한다. 인생길을 한참 가다가 돌이키지 않고 고3때 기도했다니 놀랍다. 그 후 살아가다가 길이 막힐 때 사람들과 따지고 싸우지 않고 기도원에 가서 또 금식을 한다. 한주일 금식했다고 바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안 되면 응답을 들을 때까지 수 주일을 마다않고 기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냐 아니냐의 구분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뜻을 정하면 ‘될 때까지’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신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여기서 ‘죽도록’이란 말은 영어로 “to the point of death”이다. 죽음에 이르는 시점까지 충성하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주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셨다.”(딤전1:12)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에게 직분을 주신다. 그 충성은 ‘죽도록 충성’인 것이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서 죽도록 충성하는가? 아니면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그만두는가?
다윗은 충성된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래서 다윗을 사랑하셨다. 그가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새끼를 물어가면 쫓아가서 양을 빼앗아 오고, 곰과 사자가 덤비면 죽을 각오하고 곰과 사자의 수염을 붙잡고 주먹으로 쳐서 죽인 것이다(삼상17:34-35).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겠는가? 충성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계선교를 그에게 맡긴 것이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태형을 맞고, 일주야를 흑암 가운데 보내고, 또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맞아 죽었다고 내버렸는데 나중에 살아나서 다시 또 그 성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놀라운 성령의 권능과 돌파하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죽도록 충성할 때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서 돌파가 나오고 마침내 승리하는 것이다.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
청년들과 진로상담을 할 때 “네 은사가 뭐냐, 네가 잘하는 게 뭐냐? 그 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러나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건 “네가 하고 싶 은 것을 하라”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 일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보다 더 열매가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열심을 다해서 하니까 소질이 없더라도 소질이 개발이 된다. 태어나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화가가 되고 싶어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데 성악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난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노래가 진짜 하고 싶다면 노래 부르게 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노래 잘하는 아이가 있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아이를 못 당한다. 학생들을 지도해보니까 그렇다. 그래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걸 하게 되면 자신의 능력이 극대화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르심 받은 것을 하는 것이다. 부르심 받은 것을 순종해서 하면 어떤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극대화 된다. 그렇기에 하만을 꺾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죽이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들은 자기가 잘하는 것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부르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열심히 하면 내 능력이 극대화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명하여 부르신 일을 내가 생명을 드려 충성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얻는 것이다.
모세를 보라. 자기가 좋아서 애굽의 바로에게 간 것이 아니다. 광야 40년 동안 고생했고, 백성들은 자신에게 돌을 들어 치겠다고 했지만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감당했던 것이다. 부르심 받아서 할 때, 그때 하나님의 온전한 나타남과 하나님의 최상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심 받은 일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하나님이 온전히 나타나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왕후 에스더도 부르심 받은 일을 했기 때문에 왕이 감동을 받고 하만이 단번에 거꾸러지고 부림절 의 역사가 일어났다. 자기의 지혜로 왕을 설득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인생의 중요한 굴곡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응답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응답 받지 못하면 이 말씀을 붙잡고 ‘응답 받을 때까지’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목표해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가야 할 방향을 주님으로부터 듣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을 때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부르짖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 없이 그냥 감만 가지고 가다가 막히면 그제서야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일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지만 헌신된 자로서 부르심 받은 일에 생명을 드려,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최선이 우리 조국의 역사 가운데에 나타나도록 우리가 그렇게 기도로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