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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6.25전쟁과 남한 좌익

6.25전쟁은 북한군과 남한 좌익이 합세한 전쟁

 

 

 

 

 

 

 

북한군과 남한 좌익의 대학살극

6.25전쟁 기간 동안 북한군과 남한 좌익이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한 양민의 수는 약 12만 명에 이른다(확인되지 않은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최대 100만명 추정). 그 양민 학살은 중국 남경 대학살,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대학살과 함께 20세기 3대 대학살 사건 중 하나로 불린다.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희생자 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동족 간에 일어났다는 점과 그 잔혹성 때문이다. 6.25전쟁의 원인과 양민 학살의 중심에는 북한군과 함께 그에 동조한 남한 좌익¹ 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할 때에 남한 내 수십만의 좌익세력이 있음을 강조했다. 북한은 남한지역을 점령한 후 남한 좌익들을 이용하여 양민들을 학살, 납북, 강제징집병(의용군) 투입, 노력동원 등으로 내몰았다. 9.28서울수복 이후 북한으로 탈출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과 남한 내 좌익들이 합세한 공산세력 수만 명은 지리산 등지에서 빨치산이 되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집요하게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알 수 없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전쟁사의 6.25전쟁 부분에서 좌익에 관한 서술이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6.25는 단순히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군의 도발만으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대한민국 후방에서 좌익이 동조한, 즉 내부의 적(敵)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남한에 좌익이 없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그렇게 참혹한 학살도 없었을 것이다. 6.25동란의 주체에 좌익을 포함시킴으로써 역사적인 사실을 규명하고 오늘의 한반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첫째, 6.25전쟁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다.

6.25전쟁은 국가 간 전쟁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한 내 사상을 달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일대 싸움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6.25 동란이 왜 세계 전쟁사 중에서 민간인 피해가 많고 참혹한 전쟁 중의 하나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참혹상이 은폐되고 있는지 이유도 알게 된다.

 

둘째, 6.25동란이 대한민국 속에서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6.25동란 당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장 투쟁했던 좌익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안에 살면서 북한과 동조하고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6.25동란은 과거에 종결된 전쟁,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 잊어서는 안 될 전쟁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셋째,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에 대해 갖고 있는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그 짧은 기간 내에 선진국으로 우뚝 섰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왜 과격한 반정부투쟁과 반미시위가 빈번한지, 보수·진보 또는 좌·우 간의 사상 갈등이 왜 이렇게 심한지 등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국민들조차도 그 원인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대한민국 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권침해가 극심한 북한 체제로 통일을 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며 자유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세력이 큰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북한군과 남한 좌익이 합세한 전쟁

1949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면담하였다. 스탈린은 군비 확충과 경제 지원 등의 김일성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하겠다는 주장만큼은 시기상조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49년 9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소련으로부터 탱크 등 무기와 군수물자를 대량 도입하였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병력을 지원받았다. 중국은 1948년 후반부터 1950년 5월까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중공군 내 약 5만 명에 이르는 한인 병사들을 징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북한군에 배속시켰다. 이들은 중국 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을 쌓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들의 수혈로 북한군의 전투력은 크게 증강 되었다.

 

1949년 10월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 정부를 누르고 중국 대륙을  공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다시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을 받았다. 1950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으로부터도 전쟁 수행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1970년 후르시쵸프² 의 회고록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6.25동란은 스탈린이 전쟁 주도권을 행사하고 김일성은 이 지시를 따라 시행한 괴뢰정권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 김일성은 무슨 근거로 전쟁에 대한 승리를 자신하면서 스탈린을 설득한 것 일까? 회고록에는 김일성이 남한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좌익들을 믿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김일성)는 남한에 한두 번 자극을 주기만 하면 내란이 일어나서 인민의 힘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김일성은 1949년 초부터 이미 전쟁 준비를 착수하고 있었다.

 

남침 준비와 평화공세

북한은 계획대로 전쟁 준비를 완료한 후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대남 평화공세를 강화하였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의 경계심을 흩뜨려놓고 군의 방어능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정치권이나 군 내부를 상대로 공작을 한 정황들이 많이 있었다. 전면전을 감추기 위해 심지어 남침 1주일 전까지도 대대적인 평화공세와 함께 대남 심리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 6월 7일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최고입법회의(우리의 ‘국회’)를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위해 8월 15일 서울에서 회의를 소집하자”고 남북 통일방안을 제안했다. 또 북한이 구금하고 있는 민족대표 조만식과 남한에 구금된 좌익대표 김삼룡과 이주하 2명을 서로 맞교환하자는 제안도 하였다.

 

 

북한의 전략은 전쟁에서 단시일에 승리를 거둔 후 8월 15일 광복절을 서울에서 성대하게 개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50일이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6월 25일’을 전쟁 개시 D-day로 정했다. 미군의 참전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 했던 것이다. 그만큼 남한 좌익의 동조반란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하였다는 반증이다. 김일성은 전쟁 전에 병력과 무기를 전방에 집결시키고, 전쟁 개시 후 남한 점령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좌익들을 활용한 조직체계 구성, 반동분자 처단, 토지개혁 실시 등 전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시할 인원들을 사전에 교육시켰다.

 

김일성이 모택동을 방문했을 때 ‘전쟁계획 3단계’ 수립을 설명했다. 제1단계는 군사력을 증가시키고 제2단계는 한국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통일방안을 제의하고 제3단계는 한국정부가 그 통일방안을 거부할 때 즉시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6.25동란은 전쟁 선포도 없이 북한이 느닷없이 전면 남침한 것이었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6월 27일 서울에 진입하고 28일 서울을 완전 점령하여 “서울이 해방되었다”고 선포하였다. 북한군은 남하하지 않고 3일 간을 서울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이 무너질 것으로 판단하여 3일 동안 승리에 들떠 자축하는 행사를 벌였다. 그런데 박헌영의 예측과 달리 각지에서 동조 반란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국군이 한강 남쪽에서 저지선을 구축해가자 북한군은 남쪽으로 진격을 재개하였다. 김일성은 나중에 서울에서의 3일간이 전쟁의 승리를 놓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6.25 전쟁인가 동란인가?

지금까지 6.25전쟁이라고 하면 주로 군사적 측면에서 생각해 왔다. 북한, 소련, 중공, 한국, 유엔 등의 주체들이 벌이는 전쟁의 전개 상황에만 주목해 왔다. 6.25전쟁에 대한 이런 접근 방법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고 있다.

 

첫째, 6.25전쟁이 세계 전사에서도 유명할 만큼 민간인의 피해가 크고 참혹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지 못한다. 통상 국가 간의 전쟁에서 발생하는 사망자들은 항공기의 폭격과 지상군의 총·포탄 등에 의한 것이며 주로 참전 군인에게서 발생한다. 그런데 6.25 때에는 민간인 사망자들이 군인 못지 않게 많았다. 사망자들의 시신 발견 지역과 사망 원인도 특이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전선이 아니라 후방 마을 곳곳에서 무더기로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형무소, 개울가, 구덩이, 우물, 동굴 등이 많았다. 사망 원인도 폭격이나 상호 전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총격이나 죽창, 낫, 몽둥이 등 민간 도구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둘째, 6.25전쟁을 군사적 측면에서만 바라봄으로 인해 좌익의 활동들은 자연스럽게 전쟁사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남한 내 좌익들은 6.25동란 가운데 자행한 민간인 학살 책임을 면하고, 오히려 민간인 학살은 주로 군·경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가해자인 좌익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피해자로 둔갑하는 역사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좌익들은 전쟁에 참여한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을 민간인 학살의 주범으로 몰기 위해 지금도 역사왜곡에 진력하고 있다.

 

셋째, 동족상잔의 비극을 의미하는 ‘6.25동란’ 용어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하였다. 김일성은 남침하기 전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동의를 구할 때도 남한 내에 수십만에 달하는 좌익세력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남한 내 다수의 좌익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6.25동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6.25전쟁’ 보다는 ‘6.25동란’이 보다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킨 후, 방송을 통해 좌익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다.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지역의 좌익들에게는 북한군에게 적극 협력할 것과 반동을 처단할 것을 요구했고, 점령되지 않은 지역의 좌익들에게는 폭동을 일으키거나 빨치산 투쟁을 위해 국군을 뒤에서 공격할 것을 요구하였다. 6월 28일 남로당 총책인 박헌영은 남로당원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을 하였다.

 

 

박헌영의 메시지에서 동조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데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녹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공산 치하에서 좌익들의 활동

서울 점령 후부터 서울 수복까지 3개월 동안 대부분의 남한지역은 공산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를 북한치하라 하지 않고 공산치하라고 하는 이유는 북한 공산세력과 함께 남한 공산세력 즉 좌익이 합세하여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남한 좌익이 행했던 가장 큰 악행은 민간인 학살이다. 이는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른 고의적인 것이었다. 12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물론 북한군이었지만 북한군들은 처형 대상을 정하였고, 그 처형 대상을 찾아내어 실제 집행하는 것은 그 지역 좌익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경찰, 군인 가족 등 애국지사들을 샅샅이 뒤져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 악독함은 북한군을 무색하게 하였다. 6.25동란 때 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그때가 되니 이웃이 더 무섭더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서울 수복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하였다. 북한군과 좌익은 후퇴하기 직전 그동안 체포, 수감하고 있던 우익들을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 등에서 집단 처형하기도 하고, 대한민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인사들을 상당수 북으로 끌고 갔다(8만 여명). 또한 좌익은 국군과 유엔군이 왔을 때 자신들에게 보복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마을마다 경찰, 군인, 우익인사들의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까지도 죽여 씨를 말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듯 북한군 통치기간 동안 악행을 저질렀던 좌익들은 퇴각하는 북한군을 따라 월북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도주하지 못한 북한군 잔당들과 남한 좌익들은 지리산 등지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좌익 활동을 하고도 동네에 그냥 남아 있던 좌익들은 군·경이 진주했을 때 처벌되었고, 혐의가 심하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훈방 조치되었다. 빨치산이 된 좌익들은 약 6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당시 남한 군사력에 견줄 만한 규모이다. 남한 좌익은 북한군 잔당과 한 편이 되어 대한민국과 싸웠다. 국군들은 전방에서는 북한군과 싸우고 후방에서는 빨치산과 싸워야 했다.

 

북한군이 남한 좌익을 이용했던 이유는 그 동네에 누가 경찰·군인 가족이고, 지주·자본가이고, 우익인사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그 마을 좌익들에게 시킴으로써 북한군을 배반하고 다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공산세력의 악행을 거론할 때 민간인 피살자와 납북자를 주로 거론한다. 그러나 이때 반드시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북한군과 좌익이 점령한 남한 내 각 지역에서 청소년들을 마구잡이로 징집하여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내보낸 일이다. 북한군이 주도하고 좌익들이 앞장서서 청소년들을 자원하도록 선동하고, 때로는 마을마다 가가호호 수색하여 강제로 끌어 모아 낙동강전투 등의 전쟁터로 내보낸 것이었다.

 

의용군은 15세 소년부터 50세 가까운 사람들까지 있었다. 북한군은 미 지상군 투입이 결정된 1950년 7월 1일부터 3개월 동안 약 1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의용군으로 동원하였다. 이는 국군의 수보다 더 많은 규모였다. 북한군은 이들이 전쟁터에서 도망하지 못하도록 다리에 쇠줄을 묶어 싸우게 하였고 어린 강제 징집병들에게 술을 먹여 돌격시키기도 하였다.

 

마무리하며

6.25동란은 공산주의세력이 자유민주주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말하자면 사상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족끼리 싸운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한 마을에 살던 이웃끼리도 죽이고 죽는 전쟁이었다. 이들은 지금도 서로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전쟁의 참상을 말하지 않는 후유증을 갖고 있다. 당시 좌익 활동을 하면서 많은 우익 인사들을 죽인 좌익 인사와 그 후손들이 지금도 같은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6.25동란 가운데 자행된 엄청난 좌익의 악행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이다. 또한 6.25동란이 심하게 왜곡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한 것으로, 공산주의는 위선과 거짓을 중요한 전술로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25동란의 주체 안에 남한 좌익을 넣지 않았다. 국방부에서 도 6.25동란을 군사작전에만 초점을 두고 기술하였고,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간한『한국전쟁』에서도 좌익의 활동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빨치산은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고 했던 무장 공산세력이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영화 등의 빨치산 문화컨텐츠가 대중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다. 지리산 등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오로지 혁명과 조국(북한)을 위해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포장하여. 이런 빨치산 문화컨텐츠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고 좌익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자연스럽게 풀어지도록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6.25동란 경험을 통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북한 공산당과 김일성에 대한 반감이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반공사상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었다. 6.25동란 70주년이 지난 지금 그 전쟁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의 대형 초상화가 도심 한복판 건물 외벽에 당당히 드리워져 있고, 소련 공산당 깃발, 쿠바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 깃발과 함께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들을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기독교를 대적하고,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반자유민주주의, 전체주의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우리세대들은 6.25동란을 통한 교훈들을 잊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역사적인 진실을 밝혀 다음세대에게도 전수를 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좌익¹

좌익이란 급진주의적,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적 경향의 인물 또 는 단체를 가리키는 말로 급격한 사회변화를 추구하면서 그 변화의 실현을 위해 폭 력사용을 불사하고 기존의 권위나 전통을 부정하는 사상 경향을 보이는 집단이나 사상, 운동세력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경찰학사전]

 

후르시쵸프²

후르시쵸프는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1953-64)으로 스탈린 격하운동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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