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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가로막은 6.25 동란

- 1994.6 소련의 남침작전 비밀문서 공개로 남한의 북침설 등 사라져
- 1.4후퇴 후 유엔군의 한국정부 망명계획에 이승만의 자결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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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실 | 대한민국헌정회 고문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의 합작품

통한의 6.25가 또다시 닥쳐왔다. 민족의 비극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이 일어난지 70년이 흘러갔다. 가까스로 정전(停戰)을 이룬지도 60 여년이 훌쩍 흘러갔다. 이미 두세대나 지난 세월이지만 아직까지 한반도에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고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인지 요원해 보이는 현실이다. 6.25동란, 한국전쟁은 적화(赤化)통일을 기도한 30대 중반의 김일성에 의해 벌어진 남침전쟁이다. 한때 대한민국의 70대가 넘은 노련한 이승만 대통령이 획책한 북침전쟁이거나 유인한 음모설 등 공산권의 악선전, 좌경학자들의 주장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들의 주장이 실증적인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증거가 이미 밝혀졌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친 소련 공산권의 붕괴와 때맞춰 한국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성과를 거두어 소련 및 중공 등과 한국의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공산권 자료들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소련의 옐친정부는 김영삼 정부에 100건이 넘는 조선전쟁에 관한 소련정부 비장의 비밀문건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보기관들은 김일성이 1949년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비롯한 몰로토프 등 소련정부 요빈들을 방문하고 회담한 동영상과 필름들을 다수 입수 하였다. 이런 자료들에서 1949년 초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남침 승인을 요청하고 스탈린이 중공의 마오쩌둥과 협의하여 전쟁을 수행하도록 용인한 사실들이 밝혀졌다.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마오 일행도 김일성의 의욕을 의심하여 주저했으나 스탈린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의 요구에 호응, 남침계획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런 사정은 중공(中共)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계속 밝혀지게 되었 다. 소련 못지않게 베일에 가려졌던 죽(竹)의 장막 중공의 개혁개방과 한국과 국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조선전쟁 개입과 지원 등 저간의 사정 등이 중공문서 당안(檔案)이나 학구적 연구, 참전 장병들의 회고록과 증언 등에 의해 상당부분 밝혀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가령 중소관계 전문가 선즈 화(沈志华)교수나 중공당사연구부의 리칭산(李慶山), 그밖에 양귀숭 (楊貴松), 취더쉐(薺德學), 왕수징(王樹増) 등의 성과물과 저우언라이 (周恩來)의 통역 스저(師哲) 및 비서들의 회고록, 중공군 수뇌부의 조선 전쟁참관 증언을 통해 그리고 중국공산당 관계의 환구시보(環球時報) 나 잡지, 여러 간행물 등을 통해 김일성 정권의 남침설을 뒷받침하는 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공 8로군에 편입된 조선의용군의 밀입국

특히 중공 측 자료는 김일성의 6.25동란 도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중공 8로군(八路軍) 편입 조선의용군들의 활약상을 전하고 있다. 중공은 49년 장제스(蔣介石)국부군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석권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김일성의 줄기찬 요구와 소련의 권유, 자신들 자체의 감군계획 등에 의해 항일전쟁 시 중공군에 편입된 조선 의용군 부대 10여만 명을 조선에 보냈다. 이 부대가 48년 2월 창설된 북한인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김일성은 빨치산 부대시절 동료인 김일(金 一), 김광협(金光俠) 등을 중국에 보내 유격전 경험이 많은 조선의용군의 인도 교섭을 줄곧 벌였는데 마오 등 중공간부들은 대륙을 평정한 마당에 10만 명이나 되는 외인부대를 계속 남겨둘 필요가 없어졌고 소련의 권유도 있어 이들을 모두 북한에 보내주었다. 이중에는 중공군 포병 사령관을 지낸 김무정(金武渟)을 비롯하여 김창덕(金昌德), 박일우(朴一禹), 박효삼(朴孝三), 방호산(方虎山), 전우(全宇)등 6.25전쟁 초기에 낙동강 전선까지 전광석화처럼 진군해 「전쟁 영웅」소리를 들은 노장 들이 많이 있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도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6.25 발발 전 중국사정에 밝은 이범석(李範奭) 국방부장관은 만주에 있던 중공군 소속 조선인 빨치산 부대 7개 사단이 인민군에 편성 증원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했다.

 

김일성 금괴 주고 소련서 무기 구입도

중공 측 자료에는 김일성이 1949년과 50년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하면서 황금 9톤(t), 은괴 40톤, 기타 광석 1만5천 톤 등 1억 3천 루블 상당의 액수를 지불하고 3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각종 무기와 중장비를 소련으로부터 구입했다는 주장도 끼어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인지하여 북진통일과 태평양 동맹의 구성 등을 소리 내어 추진하였고 조병옥, 정일형 등 대미 군사원조 요청 사절을 파견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렸다. 이때 미국은 원자탄을 소유한 유일한 국가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라 평화무드에 심취해 군대를 줄이고 공산위협을 경시하고 있 었다. 1949년 6월, 한국에서 오히려 2만 3천 명의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500명 전후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둔 상태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애치슨 국무장관은 50년 1월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과 타이완이 미국태평양 지역방위 전초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 호시탐탐 침공을 노리던 소련 등 공산권을 자극시키기까지 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이승만의 남한 북침설이나 전란 유도설 등 이른바 수정주의 이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남북한 모두 망명정부 검토하는 운명에 처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승세를 타고 국군과 유엔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자 50년 10월 말 북한은 수도를 평양에서 강계(江界)로 옮기고 소련 스탈린으로부터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도록 지시받았다. 김일성은 하는 수 없이 휘하의 최용건(崔庸健)을 만주 통화(通化)지역으로 급파하여 중공의 양해 아래 동간변사처(東墾辨事處) 라는 기구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오는 인민군 부상병과 패잔병들을 수용 관리하고 훈춘(珲春)등지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모병활동을 벌이며 당기관들의 소개(疏開: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함) 준비도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측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해 1951년 1월 서울이 함락되고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되자 미 관변측의 요구에 의해 일본으로 정부를 소개(疏開)시키는 가능성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주일공사였던 김용주(金龍周)씨가 도쿄에 있는 미군최고사령부(SCAP)의 협조로 요시다(吉田) 일본정부와 한국인 100만 명을 규슈(九州)의 사세보(佐世保)부근에 유치 수용하는 교섭을 벌인 적이 있었다. 미국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등이 미군 철수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심지어 맥아더 원수까지 자신의 만주폭격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설까지 등장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투르만 대통령의 결단과 차라리 자결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항의로 이 망명소동은 가라앉았다. 다행히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미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중공군의 전술을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대응, 전선을 안정시키면서 망명설은 가라앉게 되었다. 6.25동란이 가져온 한국민족의 기구한 장면들이었다.

 

김일성이 6.25 전쟁을 시작하자 서울 이승만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장면(張勉) 주미대사가 애치슨 국무장관의 안내를 받아 워싱턴의 백악관을 찾아가 거의 울먹이며 대한(對韓) 군사원조를 호소하고 트루만이 결단을 내려 미군을 참전시킨 것과 거의 비슷한 장면이 같은 해 가을 북쪽에서도 진행되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한국군이 유엔군의 상륙으로 효과적인 교두보를 설치하고 미공군의 집중 공격으로 8로군 출신들로 편성된 인민군의 주력부대가 거의 몰살 되었다. 그리고 38선을 넘어 북진한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자 김일성은 박헌영을 만주와 베이징(北京)으로 보내 마오와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박헌영은 이들을 만난 자리에서 중공의 지원군이 없으면 인민군은 미군에 의해 거의 괴멸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임을 실토하며 중공군의 지원을 읍소(泣訴)하였다.

 

6.25 동란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동서 양 진영간의 국제전으로 양상이 변모했던 것이다. 동란 초기 타이완(臺灣)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은 자신들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여 돕겠다는 뜻을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 한국정부에 통보한 적이 있었다. 이조(李朝) 말 청국(淸國)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침략을 다투던 역사를 잘 아는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는 이런 비극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백척간두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중국 군대의 한반도 상륙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급해진 김일성은 중공군의 파병지원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선대들은 남북관계를 떠나 한국인으로서는 역사적 수모와 비극을 거듭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 시작한 김일성, 스탈린에 정전 호소

51년에 들어서서 한국전쟁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된 상태로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되자 중공군의 일선 지휘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유엔군의 폭격과 화력전으로 손실되는 많은 휘하 장병들의 희생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군 등 연합군을 상대로 장기적인 소모전도 힘에 겨워 회의를 품게 되었다. 펑은 이미 양평 지평리에서 프랑스 등 유엔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이 따른 첫 패배를 당했고 이어 화천 파라호 전투에서 1개 사단(중공군 제180사단)을 완전히 상실하는 패전을 연이어 당했다. 그는 중공군 주력 130병단 사령 덩화(鄧華)를 비밀리에 본국에 보내 마오의 심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마오를 찾은 덩화는 조선전쟁에 관한 현지 사정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마오로부터 “일면 대화하며 일면 전투하는 장기전 태세에 관한 대응책”을 설명 들었다. 마오쩌둥이 미국 측과 정전협상을 시작할 뜻이 있음을 처음으로 넌지시 비친 것이다.

 

“대화하며 싸운다”는 언급에 귀가 번쩍 트인 덩화는 조선전장으로 귀환한 즉시 펑더화이 사령에게 보고하였다. 한국전쟁에서의 정전 교섭은 미국 뉴욕의 유엔 외교장에서 미국 국무성 고문 조지 케난과 소련 유엔대표 말리크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었지만 정전에 가장 목말라 있었던 사람은 미국 당국자들 못지않게 김일성 자신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김일성은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15살 연장의 선배 저우 언라이 중국 총리에게 미공군기의 폭격으로 거의 폐허가 된 수도 평양을 위시하여 도처에서 매일 기백명씩 죽거나 다치는 인민들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실토하고 있었다.

 

제공권(制空權)을 온전히 장악한 유엔공군기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멍석말이 폭격으로 중공군과 인민군, 그리고 북한인민들을 괴롭혔다. 공군을 보내 지상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지원하겠다던 소련은 만주기지에서 출격한 신형 MIG기를 통해 몇 차례 미공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시도했을 뿐, 제3차 대전으로 확전을 우려하여 더 이상 미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자제, 회피하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미5공군 등 유엔 공군을 최대한 동원하여 이른바 「교살(絞殺)작전」을 강화하고 있었다. 북한인민군 정예부대인 8로군 출신의 전투병력은 낙동강전선에서 거의 소진되어 김일성은 점령지 남한에서나 만주 등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이른바 의용군을 강제모집 충원하기에 바빴다. 중공지원군 역시 작전은커녕 이동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도 우마차(牛馬車)나 인력에 의존해 야간작업으로 겨우 때우는 형편이었다. 특히 중공군의 급식상태는 형편이 없었다.

 

중국고전의 병법(兵法)에 “건초(乾草)와 우마차가 군대와 병행 또는 선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휘부는 지킬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식용유를 이용하여 음식을 튀겨먹는 초면자육(炒麵煮肉)식습관이 있는데 미군기들의 감시와 폭격으로 연기를 내고 불을 지필 수 없어서 군졸들은 굶다시피 하며 전투하고 있었다. 저우 총리가 앞장서서 개발하고 독려하는 곡물에 소금을 가미해 만든 미숫가루나 건빵 같은 휴대식량(ration) 등도 제대로 공급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조선전쟁에 참전한 마오쩌둥의 장남 안잉(岸英)이 평북 산등성의 지휘소에서 음식을 데워 먹다가 새어나간 연기로 미공군 정찰에 발각되어 네이팜탄 공격을 받아 시체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타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의 시체를 중 국본토로 이송하려 했으나 조선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냥 조선 땅에 묻히도록 하라는 마오의 지시에 의해 평남 회창(檜倉)에 조성된 중공군 능원(陵園)에 묻혀있다.)

 

 

50년 말 미 해병대의 흥남(興南) 철수작전에는 북한체제에 싫증을 느끼거나 원자탄 투하설에 놀란 북한주민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10만 명 이 넘는 주민들이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 편에 따라 붙어 북한지역은 심각한 인구감소에 허덕이고 있었다. 펑더화이의 중공지휘부도 이제 38선까지 진군하여 전쟁발발 이전 상태를 회복하여 현상 유지 쪽으로 기울고 있어 소양강이나 한수(漢水) 이남으로 진격을 금하였다. 따라서 승산도 분명치 않은 소모적인 장기전을 더 이상 지탱할 의욕도 사라지고 그저 “엿 빨아먹듯 하는 유생역량(有生力量) 살상전”만 유지하였다. 펑더화이도 본국 중앙에 조심스럽게 정전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소련 스탈린에게 정전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미군 폭격에 북한인민 감소 감당치 못해

마오는 51년 6월에 들어서면서 조선 전쟁을 정지하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소련의 스탈린에게 문의하고 그의 심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중공군이 매우 지쳐있으며 식량과 탄약의 부족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도보로 움직이고 있는 중국군이 적군 기동부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 보고를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곧 답전을 보냈다.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조선전쟁을 가속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전제하고 “전개될 지구전(持久戰)을 통해 중국군대가 현대전을 익힐 수 있으며 미국 트루먼 정부를 동요시켜 영·미 군대의 신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소련이 신형 대포와 탱크에 대한 방어무기 등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오는 동북지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까오강(高崗)과 김일성을 보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중국 측의 관점을 보고하겠다고 통지했다. 이들을 만난 스탈린은 “당신들은 지금 잘 싸우고 있으며 계속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쪽은 미국사람들”이라며 “당신들이 미국 군사를 한명이라도 더 죽여 미국에 관을 한 개라도 더 보내면 그들이 정전을 고대하게 될 것”이라면서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말미에는 중국이 원한다면 일시적 정전에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표시도 했다. 마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일성과 까오강 그리고 저우언라이 등을 다시 소련에 보내고 중국과 북조선 전쟁 관계자들도 극비리에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조선전장에서는 서방측과 공산측이 정전 회담 자리를 마련하는 한편 일선에서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9월 스탈린은 전쟁 당사자들을 불러 정전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을 시도했다.

 

1952년 9월 모스크바의 스탈린 별장의 비밀모임에는 소련 측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 외상, 미코안, 불가닌 등 당 간부들, 그리고 중국 측에서는 저우 총리, 천운(陳雲), 리푸춘(李富春), 수위 등 공산당 수뇌들과 펑더화이 전선사령관 등이, 조선 측에서는 김일성, 박헌영 등이 모두 참석했다. 약 4시간 동안 계속된 회의에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면서 정전을 달성하자’는 데 합의했다. 특히 김일성과 가까운 저우언라이가 조선 측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스탈린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설득시켰다 한다. 이때 김일성은 근 1백만 명의 주민들이 남한으로 피난 이주했고 평양 등 주요도시와 공장지대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되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고 한다.

 

노련한 이승만의 휴전반대 전략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목매어 정전을 갈구하고 있던 시간에 김일성보다 30여년이나 더 살아온 70대 중반의 이승만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정(휴)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 최강의 미군들이 한반도에 와서 김일성과 싸우고 있는 판에 기왕에 터진 전쟁을 정전하기보다는 북한공산당을 완전히 괴멸시키고 염원인 북진통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유엔군의 강요로 최덕신 등 한국군을 옵저버로 군사정전회담에 참석토록 용인하고 있었지만 그는 남한을 온통 정전 반대의 시위와 농성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1953년 6월 정전협정을 가로막고 있던 반공포로의 송환문제를 반대해오던 유엔 측이 양보하고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무쵸 주한 미국대사가 이 박사의 임시거처인 부산 경남도지사 관저를 방문하여 그 사실을 알리자 이 박사는 결연히 반대 입장을 비장하게 피력했다. 이 자리에 입석했던 변영태 외무장관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도 살고 싶소. 그러나 그런 조건 아래서는 우리는 포로교환 등 정전에 동의할 수 없소.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하기가 어렵소”라고 이 박사는 분명히 거절했다고 한다. 클라크 장군은 그때의 모습을 그의 회고록에서 대충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항일 투쟁에서 생긴 상처로 안면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이 노인 대통령은 거의 울음 섞인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승만은 슬며시 반공포로들을 풀어주자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6월 23일 한국군의 경비 아래 수용된 2만5천명에 달하는 반공인민군 포로들을 전부 석방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포로들은 중국 측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내버려 두었다. 이 같은 반공포로의 석방에 서방측은 크게 놀라 미국은 말할 것 없고 영국의 처칠 수상까지 이 박사를 매도하고 난리를 쳤으며 미국 국방성은 이 박사를 제거하려는 군사계획까지 마련하였다. 한국 측은 끝내 정전회담에 참석, 서명하지 않은 가운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공지원군 사령관, 그리고 김일성 등 3인의 서명으로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살상의 6.25 한국전 쟁을 휴전시켰다.

 

30대 중반 김일성의 섣부른 남침 적화(赤化) 통일전쟁은 그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한국인들에게 피맺힌 한을 남기고 전 국토를 황패시킨 끝에 총성을 멈추었다. 전쟁 당사국들이 감당해야 했던 물질적인 손실은 말할 것 없고 수많은 인명의 살상으로 같은 민족끼리 원한만 깊게 쌓이게 만들어 결국은 통일을 가로막게 되었다. 북한의 1백50만 명 이상의 민간인 피해를 포함하여 남북한 합해 3천만이 못되는 전 인구의 10분의 1일이 희생되었다. 전투원들의 피해는 남한의 국군전사 13만 8천여 명, 부상 45만여 명, 실종 3만 3천여 명 등 60만 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 유엔군 쪽으로는 미군 5만5천여 명을 포함한 5만8천여 명이 전사하였고, 포로 5천8백여 명, 실종 1천여 명, 부상 4만여 명 등 5만4천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아무튼 김일성의 불장난으로 동포 간에는 원한의 골이 깊어지고 특히 인 민군이 남한을 점령한 인공(人公)치하 3개월과 빨치산 등 유격전으로 엄청난 인구와 재산상의 손실을 견뎌야했다. 전쟁발발 70여년이 지나고 이미 두 세대 이상의 간격이 있지만 한반도의 평화정책과 통일은 여전히 아득한 후일로 미뤄진 상태다.

 

* 박 실(朴實)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조지아대학교대학원(신문학MA),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수료(신문학)

한국일보기자, 한국기자협회장, 국회의원(제12~14대), 국회사무처 사무총장(제19대),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

현) 대한민국헌정회 고문, (사)대한언론인회 이사

주요 저서 : 취재전선, 한미매체비교분석(영문), 이승만박사와 미국, 박정희와 미국대사관, 80년대 정치전망,
벼랑 끝 외교의 승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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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희 교수 | 가천대학교 북한은 국가경제가 심각하게 몰락했음에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체제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와 김일성 주체사상이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은 국민들을 외부사회 정보로부터 차단시킨 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세뇌교육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신격화하였고 이를 근거로 하여 3대 세습 독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본고는 김일성 일가 신격화와 이에 대한 사상적 근거인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 분석하고, 신격화 교육에 대한 실체와 3대 세습 독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한계 상황을 다루고자 한다. 북한에서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는 정치, 사상, 법, 경제, 역사,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1. 사상적, 헌법적 토대 위에서의 신격화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는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토대인 김일성 주체사상과 맞물려있다. 김일성 주체사상은 북한의 최고 통치 이념으로 다른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 최우위에 있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을 구속하는 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1 또한 북한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교육, 문화, 군
국가인권위원회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살펴본 동성애 차별의 허구성과 차별금지법의 불필요성
박성제 변호사 | 한국기독문화연구소 차별금지법이 가져 올 거대한 쓰나미 2006년경부터 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는 한국교회의 단합된 목소리와 동성애 및 과격 이슬람의 폐해를 인식한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로 7차례 막아왔다. 제20대 국회에서는 우회적인 차별금지법인 혐오표현규제법안(김부겸 의원 발의),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법률안(신용현 의원 발의) 등의 시도가 있었으나 차별금지법의 발의는 없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을 지지층으로 삼은 정의당의 총선 공약에 따라 6. 29. 「차별금지법안」을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하였으며, 이에 발맞추어 30일엔 국가인권위원회가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라고 국회에 의견을 표명하였다. 대다수의 편향된 언론들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야 할 당위성만을 연일 쏟아내며 합리적인 반대의견을 가짜뉴스로 매도하고 있다. 이러한 여론몰이에 따라 만약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과연 한국교회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진리를 선포할 자유와 권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정의당이 「차별금지법안」의 제안 이유로 내세운 이유 중 ‘많은 영역에서 차별이 여전히 발생하고, 적절한 구제수단이 미비’하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차별금지법 막을 수 있다(낙타의 코를 세게 때려라)
이명진 소장 | 성산생명윤리연구소 2020년 6월 29일 21대 국회에서 정의당 주도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복음을 훼손하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해체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동성애를 허용하고 젠더주의를 받아들이려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가인권위원회와 일부 급진 정당에서 추진 의사를 밝혀 온 터다. 기독교의 교리를 법으로 억제하고 훼손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참으로 무례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이제 기독교계와 정면충돌만 남았다. 큰 싸움을 앞둔 지금, 대한민국 크리스천의 심정은 비장하다. 둥지의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뱀과 싸우는 어미 새의 심정과 같다. 기독교의 교리와 표현의 자유 훼손하면 안 돼 크리스천에게는 지켜야 할 교리가 있다. 교리를 잃어버린 신앙은 존재가치가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버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리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필수영양소와 같다. 필수영양소가 공급되지 못할 때 몸은 건강을 잃고 서서히 병들어 죽게 된다. 가정과 성경의 교리를 정치로 억압하고 법으로 강제하면 안 된다. 가정과 교회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기독교의 절

9월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이선호 회장 | 한국안보평론가협회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공하기 118년 전 프로이센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 다시 말해서 복수의 번쩍거리는 칼을 빼어 든 순간은 수비자에게 최고의 순간이다”라고 역설하였다. 1950년 9월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를 통해 볼 때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뿐만 아니라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혜안과 담대한 용기는 물론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지략과 전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품이었고, 20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해상전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불퇴전의 승리였다. 적의 측방을 해상으로부터 강타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다른 공격 방법은 없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많은 유질동형의 작전을 경험한 바 있으나, 단지 하나의 기계적인 작전으로 치부하였고 수륙양용 작전의 진가와 그 작전능력 보유의 효용성을 잘 깨닫지 못하였다. 1949년 가을 미합참의장이던 브레드리 장군은 일단의 해군 고위급 장교들에게 훈시를 한 다음,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가까운 장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할 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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